여행을 떠올릴 때 우리는 보통 풍경을 먼저 떠올립니다. 어디에서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무슨 건축물을 보았는지, 눈앞에 어떤 바다가 펼쳐졌는지 같은 이미지 중심의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 중 가장 깊고 본능적으로 기억에 연결되는 것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입니다. 특정한 냄새를 맡는 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장소나 장면이 즉시 떠오르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여행을 바라보고, 그 향기가 기억을 어떻게 환기하는지, 또 우리가 여행 중에 어떻게 후각을 활용해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차분히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1. 후각은 여행을 가장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감각입니다
인간의 후각은 뇌의 기억 중추인 해마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과학적 사실이 아닌,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자주 체감할 수 있는 감각적 반응입니다.
어떤 도시의 지하철 냄새, 외국 골목의 향신료 냄새, 해변 근처의 짠내와 비린내, 오래된 도시의 나무 냄새와 습기 냄새 등은 풍경이나 구조물보다 더 강하게 각인됩니다. 특히 여행 중 후각은 오롯이 ‘현장성’을 담보로 작동합니다.
사진처럼 기록할 수 없고, 풍경처럼 반복해서 재현하기도 어려운 후각은 오히려 그 순간의 생생함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기억의 가장 안쪽에 남습니다.
예를 들어, 베트남 하노이의 새벽 시장을 걷던 기억은 생선과 풀잎, 향신료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 남아 있으며, 스페인 세비야의 오후 골목에서는 오렌지나무 향이 건물 벽을 타고 퍼졌던 기억이 향기 자체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했을 때 ‘익숙함’을 가장 먼저 자극하는 것도 후각입니다. 이런 특성은 여행자가 단순히 공간을 인식하는 수준을 넘어, 감각적으로 그 도시와 연결되는 통로가 됩니다.
2. 냄새로 읽는 도시의 표정
각 도시는 고유의 향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인공적인 향수나 디퓨저가 아니라, 그 도시의 생활 리듬이 쌓여 만들어낸 냄새의 총합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일본 교토의 경우, 전통 가옥과 목재, 차, 향 등의 향이 섞여 독특한 정적을 만들어냅니다.
반면 태국 방콕은 고온다습한 기후와 다양한 노점의 음식 냄새가 뒤섞여 강한 생명력을 풍깁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건물 외벽에 밴 돌냄새와 오래된 책방, 빵 냄새가 섞여 ‘시간의 냄새’로 감지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향의 층위는 단순한 쾌/불쾌의 차원이 아닙니다.
같은 냄새라도 어떤 시간대, 어느 계절, 어떤 장소에서 맡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냄새는 도시가 외부인을 맞이하는 방식이자, 스스로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즉, 후각은 그 도시의 공기 속에 녹아든 문화적 특성과 일상의 온도를 감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여행자는 이러한 냄새를 인식함으로써 시선 너머의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향은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한 여행자의 기록에 따르면, 모로코의 페즈를 다시 떠올릴 때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가죽 시장의 독특한 냄새였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장소나 사람의 얼굴은 희미해져도, 코끝에 남아 있는 향은 한순간에 그 장면을 소환합니다.
이는 후각이 가진 ‘비언어적 회상 능력’ 때문입니다. 냄새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과 감각으로 직접 저장되고,
이후에도 언어 없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고유한 감각입니다.
따라서 향은 단지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과거로 향하는 통로이며, 여행을 마친 후에도 그 경험을 되살리는 유일한 자극이 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그곳에서 쓰던 바디워시나 룸스프레이를 다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여행 당시의 감정과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험은 이러한 원리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후각은 여행의 ‘사후감각’으로도 기능하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운’의 형태를 구체화시켜 줍니다.
감각 중심 여행을 위한 실천적 제안
후각 중심의 여행은 단지 냄새를 맡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여행자의 시선과 리듬을 바꾸는 실천이기도 합니다.
빠르게 이동하며 시각 중심의 스팟만 소비하는 여행 방식과 달리, 향을 중심에 두는 경험은 천천히 걷고, 주변을 관찰하고, 낯선 공기에 몸을 열어두는 태도를 요구합니다. 여행 중 향기로운 순간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는 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실천이 있습니다.
첫째, 지역 특유의 향이 풍기는 장소를 의식적으로 찾는 것입니다. 전통시장, 재래 목욕탕, 오래된 책방, 로컬 카페, 향신료 가게, 식물원 등은 지역의 공기가 만들어내는 고유한 향이 진하게 남아 있는 장소입니다.
둘째, 특정 향을 여행 중 반복적으로 접촉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한 도시에서는 일정 기간 동안 같은 향의 핸드크림이나 향수를 쓰는 것만으로도, 그 향이 나중에 여행 전체를 기억하는 단서가 됩니다.
셋째, 향과 관련된 로컬 제품을 직접 체험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지역에서 만든 향초, 천연 비누, 허브 티 등은 그곳의 향기 문화를 경험하는 실질적인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감각의 재구성입니다.
시각이 보여주는 풍경이 여행의 표면이라면, 후각은 그 안쪽에 숨어 있는 결을 드러냅니다.
향기를 기억하는 여행은 결국, 감각을 천천히 되살리는 방식이며, 우리가 이미 지나온 장소들을 다시 몸으로 불러오는 길입니다.
지도에도, 사진첩에도 남지 않는 ‘냄새’는 그렇게 가장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러 여행을 완성시킵니다.
향기로 여행을 기억하고 싶은 이들에게, 다음 여정은 단지 어디로 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냄새 속에서 그 여행을 저장하고 싶은가를 묻는 일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