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말' 없이 떠난 하루

by 아웃델리10 2025. 7. 7.

언어는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무심코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길을 묻고, 커피를 주문하고, 입장권을 끊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만약 하루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여행을 한다면 어떤 감각이 남게 될까요? 말 대신 몸짓, 표정, 혹은 침묵으로만 소통하며 도시를 걸어본다면 무엇을 더 느끼고 무엇을 덜 느끼게 될까요?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하여 ‘말 없이 여행하기’라는 이름의 실험적 하루를 계획했습니다. 조건은 단순합니다. 여행의 전 구간에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대화는 물론이고, 메뉴 주문, 길 안내 요청, 티켓 구매 등 일상의 모든 언어 행위를 가능한 한 배제합니다. 필기도구, 번역기, 스마트폰의 텍스트 입력 기능도 모두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표정과 손짓, 기다림과 관찰만으로 상황을 해결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글은 그 하루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며, 말이 사라진 공간에서 어떤 감각이 더 예민해졌고, 무엇이 더 어렵고 또 무엇이 자유로웠는지를 전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말'없이 떠난 하루
'말' 없이 떠난 하루

출발과 이동 – 침묵 속에 무게를 더한 선택들

오전 10시, 여행의 출발지는 지하철역이었습니다. 일상적인 통근 시간대를 살짝 피해 늦은 아침을 택한 것은 실험의 난이도를 낮추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교통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언어가 개입되지 않는 절차이기에 침묵은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부터 긴장이 감지되었습니다.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평소라면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거나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겠지만, 이번에는 소리와 문자 모두 배제했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과 표정, 손에 든 물건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사람, 전광판을 몇 번이나 확인하는 사람, 깊이 한숨을 내쉬는 사람. 평소에는 흘려보내던 모습들이 모두 다르게 읽혔습니다.

이동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앉는 자리 선택이었습니다. 누군가 옆에 앉아 있으면 말을 걸까 걱정되었고, 혼잡한 칸에 들어가기를 주저했습니다. 목적지까지 조용히 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와 시선 회피가 필요했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조건이 단번에 공간 감각과 행동의 패턴을 바꿔 놓았습니다.

침묵으로 주문하기 – 커피 한 잔이 주는 무게

여행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필수적인 행위 중 하나는 음식을 주문하는 일입니다. 이번 여행의 두 번째 관문은 바로 이 ‘무언 주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종로의 한 로스터리 카페. 입구에 들어서며 직원과 눈이 마주쳤고, 평소 같으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말했을 타이밍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직원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1개’라는 의미를 전하고, 메뉴판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항목을 가리켰습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계산기 화면에 가격을 띄워 보여주었습니다. 간단한 제스처로 결제까지는 문제없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컵에 적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어떻게 나를 인식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결국 직원은 음료가 나왔을 때 내 얼굴을 기억하고 직접 다가와 건네주었습니다.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짧은 미소와 시선 교환, 손짓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오히려 더 집중하게 되었고, 상대방도 더 주의 깊게 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커피 한 잔이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고, 그것을 마시는 공간에서의 감각도 훨씬 명료하게 다가왔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과의 거리를 넓히는 행위이면서도 동시에 긴장감을 통해 더 깊은 관찰을 유도합니다. 카페에서의 무언 주문은 단순한 기능적 성공을 넘어, 나와 타인 사이의 감각적 밀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시회 관람 – 언어 없이 보는 것의 힘

세 번째 여정은 종로구에 위치한 소규모 갤러리 관람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안내 데스크에서 입장권을 받고 작가와 전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과정 없이 조용히 들어가 벽면에 걸린 작품들 앞에 섰습니다.

의도적으로 관람객이 없는 시간대를 택했기에, 공간에는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설명문도 일부러 읽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각 정보는 허용되지만, 해석은 배제했습니다. 그림을 보고 감정을 느끼되, 그것을 단어로 마음속에 정리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이건 슬프다’, ‘이건 어둡다’는 식의 명명 자체가 언어적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은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언어화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색감, 붓의 터치, 배경의 형태 등을 보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형용사와 감탄사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를 억제하고, 그저 감각만 남기려는 노력은 오히려 작품을 더 길게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언어가 개입되지 않은 시선은 훨씬 느리고, 훨씬 세밀했습니다. 하나의 조형물을 15분 가까이 바라보는 일은 처음이었으며, 작가가 작품에 붙인 제목조차 나중에야 확인했습니다. 의미 없는 침묵 속에서 예술이 오히려 더 크게 들렸습니다. ‘말 없는 여행’은 ‘말 없는 감상’과도 이어질 수 있었으며, 이 공간은 그 연결의 정점이었습니다.

방향을 묻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기 – 비언어적 길찾기

마지막으로 시도한 실험은 낯선 골목을 걸으며 방향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 사용 없이, 오직 눈과 감각만으로 목표 장소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동대문 인근의 낯선 거리에서 출발하여, 특정 카페를 찾는 것이 과제였고, 길을 묻는 언어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은 흡사 도시 속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건물 외벽에 적힌 로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방향성, 상점 간판의 배열, 그리고 행인들의 움직임이 모두 단서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멀리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컵을 보고, 특정 브랜드의 존재를 유추한 뒤 그 방향으로 걷기도 했습니다.

30여 분간의 탐색 끝에 목표 카페에 도착했을 때, 몸은 지쳤지만 뇌는 맑았습니다. 언어 없이 길을 찾는다는 것은 평소와 전혀 다른 인식 체계를 가동해야 하는 일이며, 그것은 도시를 훨씬 더 세밀하게 바라보는 감각을 만들어 줍니다. 익숙한 풍경 안에서도 작은 사인을 읽어내야 했고, 공간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했습니다.

 

맺으며 – 말하지 않는 하루가 남긴 것들

‘말 없이 여행하기’는 단순한 침묵의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감각을 동원해야 했고, 모든 행동에 에너지를 더 많이 들여야 했습니다. 말이라는 빠르고 효율적인 도구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더 느리고 깊은 경험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주 ‘말을 하지 않고’ 공간과 타인을 인식하고 있을까요? 침묵이 낯선 사회에서, 말 없이 하루를 사는 것은 불편하면서도 진기한 방식으로 나를 환기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말 없는 여행은 누구나 쉽게 해볼 수 있습니다. 단 하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시를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완전히 다른 감각의 세계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다음 여행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침묵을 선택해보시기 바랍니다. 말 없이 떠난 하루는 그 자체로 강력한 기록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