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본래 자기 취향을 따라가는 행위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관심 있는 전시, 익숙한 분위기의 거리, 그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여행의 동선이 완성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개인적 선택을 완전히 내려놓고, ‘타인의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보는 여행’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목적은 단순합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감각을 빌려 도시를 경험하면, 전혀 새로운 결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습니다.
이 여행은 ‘한 명의 취향을 따라 떠나는 여행’이라는 이름 그대로, 실제 한 사람의 여행 동선을 그대로 따르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대상은 지인 A씨. 30대 중반, 미술을 전공했고, 혼자서 걷는 산책을 즐기며, 특정 취향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최근 서울에서 하루 동안 다녀온 여행의 기록을 사진과 메모 형식으로 남겨두었고, 저는 그 기록을 바탕으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루트로 하루를 재현했습니다.
이 글은 그 여정을 따라가며 관찰한 경험의 기록입니다.
타인의 지도 받기 – 낯선 취향의 동선을 설계하다
여행 전날, A씨에게서 루트와 설명이 담긴 문서가 전달되었습니다. 총 여섯 곳의 장소가 포함되어 있었고, 동선은 이화동 – 창신동 – 을지로 – 을지로입구 – 충무로 – 명동 순서였습니다. 각 지점마다 짧은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왜 이 장소를 선택했는지, 어떤 동선으로 연결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지도만 던져진 셈입니다.
이 과정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보통은 출발지와 목적지를 정한 뒤, 자신의 효율성과 선호도에 맞춰 일정을 짭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철저히 타인의 시선과 구조 안에 내가 들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동선 중 일부는 도로보다 골목을 선호했고, 어떤 장소는 ‘그냥 그 벽이 좋았다’는 이유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낯설지만, 그 낯섦이 여행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계획은 하루 동안 A씨의 루트를 따라 걷되, 가능한 한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 도착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장소의 선택은 이미 완료되었기에, 나에게 허용된 선택지는 ‘어떻게 바라보는가’뿐이었습니다.
이화동의 낡은 계단 앞에서 – 첫 감각의 불일치
첫 장소는 이화동 벽화마을 초입에 위치한 작은 계단이었습니다. A씨는 “이 계단 위에 앉아서 10분간 가만히 있으니, 갑자기 여름 냄새가 느껴졌다”고 메모에 적어두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착했을 땐 바람이 불고 있었고, 주변은 공사 중이었으며, 여름의 냄새보다는 먼지와 시멘트 냄새가 먼저 느껴졌습니다.
이 순간, 내가 타인의 감각을 그대로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 구조에 놓였음에도 감각은 다르게 작동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런 감각의 불일치가 오히려 여행을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건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느꼈던 것을 내 몸을 통해 ‘어떻게 다르게’ 느끼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계단 위에 앉아 있던 10분 동안, 나는 그 공간의 공기 밀도, 주변 사람의 발소리, 저 멀리 들리는 학교 종소리를 천천히 관찰했습니다. 내 감각은 A씨의 메모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지만, 그가 왜 이 공간을 ‘정지된 계절’이라 표현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창신동의 가파른 골목 – 움직임의 호흡을 맞추다
다음 장소는 창신동의 좁고 가파른 골목이었습니다. ‘걸어 올라가는 동안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 길’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별것 아닌 경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가팔랐고, 벽과 벽 사이 간격이 좁아 시야도 제한적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골목에는 중간에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 구조가 있었고, A씨는 그 지점을 ‘내가 길을 정한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밀어냈다’는 표현으로 남겼습니다.
실제로 그 지점에서 나도 방향을 의도적으로 고르지 않고, 그저 몸이 가는 대로 걸었습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 끝에는 오래된 이발소 간판이 달린 빈 건물이 있었습니다. 건물은 폐쇄되어 있었지만, 창 너머로 오래된 파란 소파와 거울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메모에는 없었지만, 아마도 A씨도 같은 풍경을 마주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고, 나는 그 대신 그것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여행을 따라간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프레임 속에 내가 새롭게 들어가는 일이자, 비어 있는 여백을 내 감각으로 채워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을지로에서 명동까지 – 취향의 결로 완성되는 여정
을지로 구간은 A씨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구간이었습니다. 세운상가를 지나, 공구상과 포장마차, 인쇄소와 전기상가 사이를 걷는 이 구간은 특유의 도시적 밀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A씨는 이 지역을 ‘도시라는 기계의 내부를 걷는 느낌’이라 표현했습니다. 실제로도 을지로는 기계 부품과 철재 구조물, 파이프 소리 등 도시의 해부학적 단면이 드러나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그가 어떤 감각을 포착했는지를 되짚어 보며 걸었습니다. 작은 철제 사다리를 타고 2층 작업장으로 오르는 장인의 모습, 덜컥거리는 엘리베이터, 허공에 고정된 오래된 전깃줄. 이 모든 요소들이 ‘취향’의 층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명동으로 이동하면서 동선은 갑자기 사람 많고 번잡한 구역으로 전환됩니다. 의아했지만, A씨는 여기에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조용한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 소란스러움이 그리워졌다.” 이 부분이 여행의 핵심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취향이라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감정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 그 변화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자,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마무리 – 내가 아닌 감각으로 여행할 수 있을까?
타인의 여행 루트를 따라가는 경험은 생각보다 더 주의 깊은 관찰을 요구했습니다. 같은 장소를 보더라도 내 눈은 다르게 작동하고, 같은 시간에 머무르더라도 내 감각은 다른 층위에서 반응합니다. 그렇기에 이 여행은 ‘똑같이 체험하기’라기보다는, ‘차이를 인식하며 걷기’에 가까운 작업이었습니다.
내가 고른 여행에서는 절대 가지 않을 골목, 머무르지 않을 시간대, 들르지 않을 가게들을 지나며, 나는 점점 더 그 사람의 시선이 가진 방향성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취향의 반영이 아니라, 그것이 구조화된 하나의 세계관임을 실감했습니다.
이러한 여행법은 앞으로도 반복 가능성이 높은 방식입니다. 누군가의 하루 루트를 빌려 걸어보는 것. 그 안에서 내가 놓쳤던 도시의 결을 다시 발견하고, 나의 시선이 얼마나 특정한 기준에 갇혀 있었는지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언젠가 친구, 가족, 혹은 낯선 누군가의 여행 일지를 따라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단순한 동선의 복제가 아니라, 타인의 삶과 감각을 조심스레 훔쳐보는 섬세한 탐색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