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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지도로 걷는 오늘의 도시

by 아웃델리10 2025. 7. 7.

도시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골목이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서며, 익숙했던 간판도 어느새 낯선 브랜드로 바뀝니다. 그러나 과거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단지, 눈에 띄지 않을 뿐입니다. 이번 여행은 그런 숨은 흔적들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출발점은 단순했습니다.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1997년 서울시 지도’ 한 장. 그 지도를 들고, 지금의 서울을 걷는 여행. 현재를 과거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기 위한 일종의 감각 실험이었습니다.

지도에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버스 노선, 철거된 동네 이름, 사라진 극장과 시장, 예전의 지하철 출구 번호까지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그 지도를 바탕으로 오늘의 서울을 걸으니, 익숙한 거리조차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 거리에는 이미 사라진 것들의 잔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90년대 지도로 걷는 오늘의 도시
90년대 지도로 걷는 오늘의 도시

사라진 이름의 흔적 – 종로의 ‘피맛골’을 다시 걷다

90년대 지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피맛골’이라는 지명이었습니다. 종로2가와 종로3가 사이에 좁고 긴 골목으로 표시된 이 지명은, 당시만 해도 서울시 공식 행정지도에도 등장할 만큼 명확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도에서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높은 건물과 정비된 거리, 깔끔한 표지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실제 현장을 찾았을 때, ‘피맛골’은 물리적으로는 일부 보존되어 있었지만, 그 의미는 많이 퇴색되어 있었습니다. 골목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은 대부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피맛골의 역사와 유래를 설명하는 패널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마부나 하인들이 양반을 피해 걸었던 골목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스토리텔링 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지도에는 존재하지만 현실에는 사라진 경계선이, 실제로는 도시의 구조에 일부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오래된 건물의 벽 사이 간격, 골목의 너비, 보도블록의 색감 등은 예전 도시 구조의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 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지금은 ‘사직로 8길’로 불리는 좁은 길목에서 만난 철제 우편함이었습니다. 누렇게 변색된 우편함에는 여전히 90년대의 상호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작은 흔적이 지도와 연결되었을 때, 비로소 사라진 피맛골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났습니다.

폐선된 버스노선의 그림자 – 신촌에서 마포까지

90년대 지도에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버스 노선들이 여럿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 중 173번 버스는 신촌에서 마포를 지나 용산까지 이어지는 경로였습니다. 지금은 간선버스 번호 체계가 바뀌었고, 이 노선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버스 정류장을 따라 걸으며, 옛 노선의 자취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신촌 로터리에서 출발하여 이대역, 아현동, 공덕동을 거쳐 마포역까지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부를 연결하는 주요 축입니다. 그러나 각 정류장의 표식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작은 철제 표지판에 버스 번호가 큼직하게 적혀 있었지만, 현재는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QR코드가 삽입된 스마트 정류장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특히 아현동 인근에서는 폐업한 상가 간판에서 90년대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모닝치과’, ‘청춘오락실’ 같은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일부 낡은 간판은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포역 인근에서는 과거 버스노선도로가 골목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점도 인상 깊었습니다. 현재의 대로 중심 교통망이 생기기 전, 실제 생활권을 연결하던 버스 노선의 감각이 더 인간 중심적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노선은 단순히 이동 경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머물고 대기하던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었습니다. 과거 노선의 기억을 바탕으로 지금의 거리를 다시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도시의 시간감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라진 극장, 남은 기억 – 을지로 ‘단성사’의 자리

지도에는 분명히 ‘단성사’가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명동과 을지로 사이에 위치한 서울 대표 극장이자, 90년대 서울 시민들의 문화적 중심이던 곳입니다. 하지만 현장에 가보면 그 자리는 현대식 건물로 완전히 재개발되어 있었고, 극장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거리 이름 ‘단성로’에만 그 이름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지점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도시의 건물은 사라져도 이름은 지도 속에 남고, 그 이름은 어느새 행정 지명으로 바뀌어 새로운 층위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단성사’를 찾기 위해서는 더 이상 극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새겨진 표지판이나 사람들의 기억을 추적해야 합니다.

단성사가 있던 거리 끝에는 한 장의 벽화가 있었습니다. 극장 좌석을 묘사한 그림이었고, 그 위에는 ‘추억을 간직한 거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문구는 도시가 사라진 것을 기억하려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상징물보다 더 생생한 단서는 그 옆에 위치한 24시간 우동집이었습니다. 주인장의 말에 따르면 “단성사에 영화 보러 오던 손님들이 줄을 서던 그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도에는 없지만, 현재에 남은 사람과 공간이 과거를 복원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90년대 지도를 들고 걷는다는 것은 단지 공간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기능과 기억의 층위를 더듬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화된 도시와의 겹침 – 시간의 동거

마지막으로, 90년대 지도와 오늘의 서울을 비교하며 걸었을 때 느낀 것은 ‘시간의 동거’입니다. 도시는 결코 과거를 완전히 지우지 않습니다. 사라진 건물이나 상호, 기능은 없어졌지만, 거리의 형태나 사람들의 동선, 간판의 높이, 담장의 곡선 같은 미세한 요소들은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청계천 근처의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간혹 과거 상호명이 아직 남아 있는 출입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성카세트’, ‘골든세탁소’ 같은 이름은 현행 네이버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오래된 종이 지도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 낡은 이름과 오늘의 거리를 겹쳐보는 순간, 도시의 시간은 병렬적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시간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흐릅니다. 같은 공간 위에 다른 시대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90년대 지도를 기준으로 오늘의 도시를 걷는 여행은, 그 수평적 시간 위에서 과거의 시선으로 현재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의 전환이었습니다.

 

맺으며 – 오래된 지도로 다시 만나는 서울

이번 여정은 단순한 향수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도시를 해석하는 방식의 실험이자, 현재를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기반을 더듬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래된 지도는 과거를 가리키는 도구가 아니라, 현재의 또 다른 해석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어느 날 도시를 걷다 잠시 멈춰 섰을 때, 주변을 둘러보며 “여기 원래 뭐였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순간이 바로 이 여행의 시작점일 수 있습니다. 구형 지도 한 장이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당신이 아는 도시가 낯설게 보이고, 낯선 장소가 다시 익숙해지는 경험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