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여행은 공간 중심으로 계획됩니다. 어디를 갈지, 어떤 동선을 짤지, 위치 기반의 판단이 우선됩니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중심으로 여행해본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오후 3시만 걷는 여행’이었습니다. 특정한 한 시각, 하루 중 단 한 시간만 허락된 이동. 그 시간에만 걷고, 그 외의 시간에는 정지한 채 머무는 여행이라면, 나는 무엇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될까?
‘오후 3시’라는 시간은 하루의 한가운데이면서도 이미 절반이 지난 순간입니다. 햇살은 기울기 시작하고, 거리에는 낮과 밤의 기운이 교차합니다. 누군가는 퇴근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아직도 바삐 움직이며, 도시 전체가 어딘가 흐릿해지기 시작하는, 그런 이도 저도 아닌 시간. 이 모호한 오후 3시에만 집중하여 도시를 바라본다면, 여행의 밀도와 결이 어떻게 달라질까를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목적지는 서울의 을지로. 변화와 멈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인 도시의 단면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동네이자, 하루 중 같은 장소도 시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곳입니다.
오후 3시에만 길 위에 서본다는 것
을지로의 오후 3시는 참으로 모순적인 시간입니다. 식사 시간은 끝났지만 아직 퇴근도 멀었고, 카페는 붐비지 않지만 골목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에만 거리를 걷기로 정하자, 놀라울 정도로 도시의 리듬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3시가 되기 전,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소 창밖을 보며 시간을 기다립니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이 시간에만 걷는다’는 제약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한 시간을 더욱 밀도 있게 살아내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마치 식사를 하루에 한 번만 하기로 하면 그 한 끼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 것처럼, 한 시간만 걷는 여행은 그 60분이 주는 감각을 배가시킵니다.
3시가 되자마자 골목으로 나섭니다. 첫인상은 ‘빛’입니다. 오후의 햇살은 건물의 모서리를 더 길게 드리우고, 간판의 그림자를 벽면에 옮깁니다. 특히 오래된 간판이 많은 을지로에서는 그림자가 시간의 언어처럼 골목에 새겨집니다. 점심을 마치고 여유를 즐기며 골목을 걷는 노년의 뒷모습, 현장을 점검하러 나온 인부들의 짧은 담배 타임, 개방된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미싱 소리와 미세한 라디오 음악까지, 이 모든 것이 오후 3시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낮의 끝과 밤의 시작 사이, 풍경이 변하는 순간들
오후 3시는 빛의 톤이 급격히 바뀌는 시간입니다. 을지로 3가역에서부터 청계천 방향으로 걸으며, 같은 건물이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오전 11시에 봤던 그 간판이 오후 3시에는 유난히 따뜻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벽돌 건물의 표면은 햇살의 방향에 따라 질감이 달라졌고, 노란 전구 아래 놓인 작은 식물 하나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3시는 ‘대기’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이 다음을 준비하는 순간.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은 노트북을 닫고 일어날 준비를 하고, 공사 현장에서는 퇴근 전 점검을 위해 서둘러 정리를 시작합니다. 주점들은 문을 열기 시작하고, 바깥 풍경을 정리하던 직원들은 메뉴판을 내걸며 조명을 켭니다. 도시 전체가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기 위한 몸을 푸는 듯한 장면들이 펼쳐졌습니다.
그 순간들 속에서 나는 도시가 ‘변화하는 시점’에 가장 솔직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시간, 즉 과도기적 시간에 도시의 본래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흔히 ‘낮의 도시’ 혹은 ‘밤의 도시’를 이야기하지만, 그 사이의 ‘애매한 오후’야말로 진짜 도시의 속살을 볼 수 있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정해진 시간만 움직인다는 제약이 만든 집중
이 여행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시간 제한’이 주는 집중력의 변화입니다. 보통은 장소에 따라 리듬이 바뀌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여행을 통제합니다. “3시가 되면 나간다, 4시가 되면 돌아온다”는 규칙을 만들고 나니, 나는 그 1시간 안에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장소를 고르는 데 신중해졌고, 무심코 지나치던 것에도 시선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을지로5가 방면의 골목을 걷다가, 낡은 벽돌 틈에서 피어난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를 발견했습니다. 평소라면 사진 한 장 남기고 지나쳤을 풍경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앞에 5분 넘게 서 있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이 아닌, 시간의 한 조각에 몰입하는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은 것에 시선이 오래 머물다 보면, 도시 전체가 낯설어지기 시작합니다. 늘 보던 간판조차 다른 문구로 보이고, 문 앞에 걸린 고무장갑조차 기호처럼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만 움직인다는 조건은 도시를 더 신중하게 대하게 만들고, 그만큼 더 섬세하게 느끼도록 만듭니다. 거리의 온도, 바람의 방향, 골목의 소리까지도 ‘지금 아니면 느낄 수 없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4시가 되었고, 나는 조용히 숙소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여행을 시간으로 정의해보는 실험
‘오후 3시만 걷는 여행’은 결국 여행의 기준을 바꾸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행에서 ‘장소’를 중심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언제 그곳에 있었는가’라는 시간의 감각에서 비롯됩니다. 같은 장소라도 새벽에 본 풍경과 저녁에 본 풍경은 전혀 다릅니다. 이번 여행은 그 감각을 더 날카롭게 다듬는 일이었습니다.
오후 3시는 이상한 시간입니다. 나른하면서도 생기 있고, 느릿하지만 어딘가 성급합니다. 이 모순적인 기운을 가진 시간에만 움직이기로 한 이 여행은, 나에게 도시의 미묘한 틈새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가야 할 곳’만 생각하며 여행하지만, ‘언제 움직일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전혀 다른 감각의 여행이 가능해집니다. 오후 3시에만 떠나는 여행,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으로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마치며
시간은 언제나 흐르지만, 우리는 그 흐름을 의식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번 여행은 ‘하루 중 단 1시간만’ 허락된 이동이 얼마나 밀도 높은 감각을 선사하는지를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특정한 시간을 중심으로 여행을 짜보는 건 어떨까요? 하루 중 단 한 시각만 허락된 여행은 오히려 그 하루 전체를 더 선명하게 기억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오후 3시에만 걷는 도시를 떠올리며, 그날의 공기와 빛, 그리고 감정을 오롯이 되새기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