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AI가 고른 여행지에 다녀왔습니다

by 아웃델리10 2025. 6. 28.

여행은 흔히 ‘나의 선택’이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기후, 풍경, 맛집, 트렌드를 고려하고, 직접 정보를 검색해 루트를 짭니다.

그러나 최근의 여행은 점점 더 알고리즘에 의해 설계되고 있습니다. ‘이런 장소를 좋아할 것 같아요’, ‘방금 다녀온 이곳과 비슷한 취향이 있다면 여기도 좋아하실 거예요’라는 추천이 쏟아지고, 우리는 그 중 몇 가지를 무심코 고릅니다.

여행이 자율성과 탐색의 결과라기보다, 취향 데이터의 결합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직접 시도한 ‘알고리즘이 골라준 여행지’ 실험을 통해, 그 여행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무엇이 기대 이상이었고, 무엇이 미묘하게 어긋났는지, 그리고 인간과 기술 사이의 여행 감각은 어떻게 조율되어야 하는지를 전해보고자 합니다.

AI가 고른 여행지에 다녀왔습니다
AI가 고른 여행지에 다녀왔습니다

알고리즘에 일임하기 – 여행을 계획하지 않은 여행

이번 실험은 한 가지 전제를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여행지 선정부터 동선 구성까지, 모두 인간이 아닌 추천 알고리즘에 맡겨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넷플릭스, 유튜브, 지도 앱, 예약 플랫폼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수년간 축적된 ‘나의 취향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천되는 여행지와 숙소, 식당, 카페를 정리했습니다. 가장 주요하게 참고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로였습니다.

첫째, 숙박 예약 플랫폼의 ‘취향 맞춤’ 숙소 추천 기능입니다. 제가 자주 예약한 숙소 패턴(작은 규모, 독립적 건축, 도심 외곽 위치 등)에 따라 추천된 숙소 리스트에서 상위권에 있는 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둘째, 구글 지도에서 ‘방문 기록을 바탕으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장소’에 올라온 명소 및 카페 목록입니다. 이 리스트는 평소 제가 체크한 장소들의 패턴(조용한 골목, 식물 많은 인테리어, 베이커리 중심 카페 등)을 기반으로 자동 생성된 것입니다. 셋째,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자주 보는 피드’의 이미지 유사도를 분석해 추천된 태그 기반 지역이었습니다.

그 결과, 서울과 경기의 경계에 위치한 한 작은 도시 외곽이 최종 목적지로 정해졌습니다. 이곳은 제가 그간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는 지역이었고, 지명조차 낯설었습니다. 여행 일정을 일일히 계획하지 않고,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동선을 최대한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불확실성과 실험성을 담보로, 여행을 계획하지 않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기계가 안내한 길에서 마주친 풍경들

여행의 첫 목적지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기억에 남을 로컬 숙소’였습니다. 결과는 놀라울 만큼 정교했습니다. 숙소는 한옥을 현대적으로 개조한 독립형 구조였고, 창밖으로는 작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호스트가 제공하는 웰컴 티와 조용한 조도, 미니멀한 인테리어는 제가 선호하는 감각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느껴진 것은 ‘데이터가 나를 예상보다 잘 알고 있다’는 일종의 경이로움이었습니다.

이후 구글 지도가 추천한 ‘이 근처에서 좋아할 만한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소형 갤러리 겸 북카페였고, 다음은 자연주의 콘셉트의 로컬 베이커리였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두 장소 모두 번화가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비교적 외진 곳에 있었지만, 공간 구성이나 분위기는 제 취향과 매우 가까웠다는 점입니다. 이는 알고리즘이 나의 행동 기록뿐 아니라, ‘머무는 시간’과 ‘사진 촬영 빈도’, 심지어 ‘지도 내 이동 패턴’까지 분석한 결과임을 직감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정 맛집으로 향하던 길에서, 영업시간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도착했을 때 이미 문을 닫은 경험도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카페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외양만 보고 방문했지만, 실내 분위기나 소음도가 기대와 달라 오래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이때 느낀 것은 기계의 추천은 '경험'이 아닌 '유사성'에 근거한다는 한계였습니다. 이전의 경험과 시각적으로 비슷한 것을 제안하긴 하지만, 맥락은 인간이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상 가능성과 예외의 경계 – 추천의 편안함과 단조로움

알고리즘 기반 여행의 또 다른 특징은 일정 전반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안정감’ 속에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분명한 장점도 갖습니다. 기본적으로 낭비되는 시간이 적고, 불쾌한 경험이나 예기치 않은 변수는 최소화됩니다. 그러나 그만큼 예외적인 발견이나, 의도하지 않은 인상적인 장면은 줄어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전통시장 골목을 지나가던 중 한 노점의 국화차 향기에 끌려 잠시 멈췄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어디에도 추천되지 않은 곳이었고, 제 행동 이력에도 기반하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우연성이 더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순간 저는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장소가 ‘경험의 외연’을 줄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한 반복되는 분위기의 장소들이 일정 중간부터는 다소 단조롭게 느껴졌습니다. 가구의 톤, 음악의 장르, 커피 메뉴 구성까지 반복되는 패턴은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약간의 피로감을 유발했습니다. 이는 알고리즘이 다양성보다는 최적화된 안정감을 추구한다는 구조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여행에서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과 충돌이며, 그것이 기억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알고리즘 사이, 여행을 재설계하는 법

이번 실험을 통해 느낀 가장 큰 수확은,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추천이 때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대신해 여행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알고리즘은 방향을 제안할 수 있지만, 풍경을 감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인간의 감각은 맥락과 우연, 감정과 연결의 체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데이터로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후의 여행에서는 ‘하이브리드 루틴’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기본 루트나 장소 선정은 알고리즘을 참고하되, 하루 일정 중 30%는 전적으로 즉흥적 판단에 맡기는 방식입니다. 또한 장소 자체보다는 동선을 설계하고, 주변 맥락을 관찰하는 법도 중요합니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장소에서도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를 스스로 물어보는 일은, 감각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여행은 점점 더 기술적으로 구성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의 감각을 어떻게 유지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완벽하게 최적화된 일정도 좋지만, 가끔은 예외와 낯선 선택이 감각을 흔들어줍니다. 알고리즘이 고른 여행지는 그 자체로 좋은 실험이었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벗어날 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맺으며
알고리즘이 고른 여행지는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내 취향을 세밀하게 예측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행의 진짜 가치는 우연과 의문, 감정과 충돌 속에서 피어난다는 사실도 함께 배웠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기술적 제안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왜 이 장소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태도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알고리즘이 고른 풍경 너머, 감각이 고른 여행을 시작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