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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여행이 남긴 것들

by 아웃델리10 2025. 6. 27.

여행은 늘 설렘과 기대를 동반합니다. 길을 떠나기 전 우리는 사진 속 풍경을 상상하고, 그곳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항공편이 지연되거나, 예약한 숙소가 문을 닫았거나, 생각보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현지 날씨나 사람들과의 사소한 오해로 여행 전체가 삐걱거리는 일도 잦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SNS나 블로그에 ‘성공한 여행’의 순간만을 기록하지만, 오히려 실패한 여행은 그만의 진한 흔적을 남깁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직접 경험한 여러 실패한 여행들을 테마별로 풀어보며, 그 안에서 얻은 감각과 반추할 만한 지점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망한 여행이 남긴 것들
망한 여행이 남긴 것들

목적 없는 도시, 길을 잃고 돌아오다

몇 해 전, 혼자 도쿄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이나 테마 없이 그저 ‘아무 때나 떠나고 싶다’는 감정 하나로 예약한 비행기였고, 도착한 순간부터 막연함이 머리를 지배했습니다. 숙소는 도쿄 외곽의 작은 민박집이었고, 주변엔 관광명소도, 분위기 있는 카페도 없었습니다. ‘나만의 여행’을 꿈꾸며 지도 없이 거리를 걸었지만, 방향을 잃은 채 도심 외곽을 맴도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어느 날은 6시간을 걸었지만 결국 돌아온 건 편의점 도시락 한 개였습니다.

이 여행이 실패였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준비 없는 즉흥은 경험의 깊이가 아니라 표면만을 훑게 만든다는 점, 그리고 도시를 향유하려면 최소한의 구조나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도쿄에서 며칠을 머물렀지만, 기억에 남은 것은 정처 없이 헤매던 공원 옆 벤치와 저녁 무렵 건물 틈 사이로 비치던 주황색 햇살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실패를 통해 저는 하나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도시에는 방향이 필요하고, 방향에는 나만의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 아무 목적 없이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그 안에 하나의 질문쯤은 품고 있어야 풍경이 의미를 얻는다는 사실을요.

날씨에게 뺏긴 여정, 타이베이의 3일간

타이베이 여행은 모든 계획이 무너졌던 여행이었습니다. 출발 전부터 강수확률 80%의 예보가 있었지만, 단순히 흐린 정도겠거니 생각하고 우산 하나만 챙겼습니다. 그러나 타이베이에 도착한 순간부터 여행 마지막 날까지, 비는 쏟아지는 수준으로 이어졌고, 우비 없이 여행을 감행한 결과 신발은 하루 만에 젖고 말았습니다. 화려한 야시장도, 라오허제 사원도, 국립고궁박물관도 빗속에서는 온전히 즐기기 어려웠습니다. 비가 내리는 도시의 감성은 잠시뿐이었고, 축축한 옷과 불편한 교통, 끈적한 습도가 결국 짜증과 피로를 쌓이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날씨라는 변수에 대응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흘러간 시간 속에서 여행자의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얼마나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는가,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어떤 변수까지 고려하는가, 그리고 불완전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새롭게 얻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입니다. 결국, 타이베이의 3일은 많은 장면을 놓쳤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도시에서 경험한 실패는 이후의 여행에서 우비, 방수 신발, 여벌 옷이라는 세 가지 필수품을 여행 가방에 넣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한 도시, 낯선 친절의 경계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은 종종 그 여행 전체의 인상을 결정짓습니다. 특히 언어가 통하지 않거나 문화적 맥락을 잘 모를 때, 사람들과의 접촉은 여행에 강한 기억을 남깁니다. 베트남 호찌민을 여행했을 때의 일입니다. 택시에서 바가지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현지 택시 앱까지 확인한 뒤 정식 택시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했음에도, 내릴 때 기사는 별다른 설명 없이 미터 요금 외의 금액을 요구했고, 영어도 통하지 않아 결국 분쟁 끝에 손해를 본 채 내려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게에서 음료를 주문할 때 현지 가격의 두 배를 제시받았고, 시장에서는 고의적인 거스름돈 누락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모두의 여행에 해당하지는 않겠지만, 당시의 저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기보다 실망과 분노에 빠졌습니다. 기대했던 ‘따뜻한 아시아’의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되돌아보니, 문제는 단지 상대방의 태도뿐 아니라, 내 안에 있던 ‘친절해야 한다’는 기대감이 너무 컸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기대 없는 시선’을 갖는 법, 그리고 스스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기본적 방어선—예컨대 요금 확인, 메뉴 가격 확인, 거스름돈 계산 등—은 이 실패를 통해 얻은 실질적인 교훈이 되었습니다.

실패로 여행을 기록하는 방법

여행의 실패는 보통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공적인 여행, 잘 나온 사진, 멋진 숙소나 인스타그래머블한 식당의 기록을 중심으로 여행을 재구성합니다. 그러나 진짜 기억에 남는 것은 오히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것이 남긴 감정의 여운이 어떻게 쌓였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실패한 여행은 단순히 ‘실패한 기억’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태도, 감정, 선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 경험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여행을 다녀온 후, 사진보다 먼저 ‘실패 포인트’를 기록합니다. 그날 기차를 놓친 일,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식당에서 재료가 모두 소진되어 있었던 일, 예약한 숙소가 실제 사진과 달랐던 순간. 이 모든 것이 단지 웃어넘길 에피소드가 아니라, 여행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층위로 남습니다. 이 방식은 여행을 더욱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하며, 다음 여행에서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맺으며
성공적인 여행만이 좋은 여행은 아닙니다. 실패한 여행이야말로 여행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예기치 않은 변수에 어떻게 대응하고, 예상 밖의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며,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어떻게 나 자신을 조율했는지는 곧 여행을 넘어 삶의 태도로 이어집니다. 이번 글에서 나눈 여러 실패들은 어쩌면 작은 시행착오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쌓여 또 다른 여행을 만들어가는 초석이 됩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실패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새로운 도시를 만나는 일에 더 설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