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 도착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내된 방향으로 걷습니다.
지도에 표기된 관광지, 검색 상위에 올라 있는 명소, 가이드북에 소개된 코스. 이 모든 정보들은 한결같이 어떤 ‘장소’를 향하게끔 유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한 장소 앞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면, 그 방향엔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관광지를 등지고 걷기’라는 조금은 역설적인 방식의 여행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는 잘 알려진 스팟이 아닌, 그 장소를 둘러싼 공간을 걷는 일이며, 목적지보다 경로에 더 집중하는 감각적 여행법입니다.
‘굳이 이걸 왜 하나’ 싶은 의문과 함께 시작될지 모르나,
그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들은 오히려 ‘진짜 장소’의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왜 ‘유명한 장소’를 등지고 걷는가
여행이란 기본적으로 ‘어디에 간다’는 움직임을 전제로 합니다. 이때 ‘어디’는 대부분 특정 명소나 관광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명소는 수많은 사람이 찾는 장소이자, 이미 너무 많이 찍히고 설명된 공간입니다. 물론 이들 명소는 그 자체로 훌륭한 콘텐츠입니다. 문화적 가치, 경관의 아름다움, 역사적 의미 등은 누구나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만을 중심으로 여행을 설계하게 되면, 공간의 진짜 구조와 흐름을 감지하기 어렵습니다. 일례로, 경주의 대릉원 입구에서 사진을 찍는 이들은 많지만, 대릉원을 등지고 북쪽 한적한 주택가 쪽으로 걷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된 식당, 아담한 책방, 주민들의 조용한 산책로 등이 이어지고, 이는 오히려 그 도시의 일상과 가까운 풍경일 수 있습니다.
‘관광지를 등지고 걷기’란 이처럼 한 번쯤 방향을 반대로 설정해보는 시도입니다. 여행지를 구성하는 것은 결코 명소 하나가 아닙니다. 그것을 둘러싼 주변의 조직, 흐름, 생활, 구조물, 거리의 톤, 표정들입니다. 우리가 특정 명소에서 카메라를 돌려 등진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을 때, 그 순간부터 장소는 다시 구성되기 시작합니다. 여정이란 결국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연속된 장면이기에, 방향을 바꾸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여행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등진 방향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관광지를 등지고 걷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비어 있음’입니다. 사람의 흐름이 없고, 길 안내 표지도 희미하며, 카페나 상점이 뜸해지는 길들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 비어 있음은 꼭 단점으로만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도 높은 체험을 방해하던 요소들이 사라지고, 그 공간이 지닌 본연의 리듬과 분위기를 온전히 감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일례로, 전주 한옥마을에서 남쪽 출입문을 벗어나 걷다 보면 좁은 골목을 지나 구도심의 오래된 주택가를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 없는 담벼락, 낡은 상점의 간판, 벽돌에 새겨진 그림자 같은 생활 흔적들이 도시의 속살처럼 드러납니다.
또한 등진 방향은 종종 과거의 시간과 맞닿아 있습니다. 대부분의 명소는 도시 이미지화의 중심에 놓이기에 주변이 지속적으로 정비되고 관리됩니다. 반면 반대 방향은 도시개발의 후순위로 밀려 있는 경우가 많아, 그만큼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오래된 질감이 남아 있습니다. 파리의 에펠탑이 있는 샹드 마르스 공원을 등지고 트로카데로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 비교적 덜 알려진 골목과 서점, 조용한 까페 거리가 펼쳐지며,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을 등지고 서쪽으로 향하면 오래된 골목과 시장이 여행자보다 지역 주민들에게 더 많이 점유된 공간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관광지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의 구조를 탐색하는 태도를 만들어 줍니다.
걷기의 결이 바뀌는 순간
등지고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동선의 문제를 넘어서, 걷는 방식 자체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관광지를 향한 걷기는 보통 목적형 걷기입니다. 어디까지 가는가, 무엇을 보는가, 얼마 만에 도착하는가에 초점을 둡니다. 반면 등지고 걷는 길은 목적 없이 흐름을 따라가는 구조이며, 여정 자체가 관찰과 사색의 행위로 채워집니다. 이런 걷기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옆으로, 뒤로 분산시키며 디테일한 감각을 끌어냅니다. 가게의 간판 글씨, 벽돌 사이에 핀 잡초, 문 앞에 놓인 화분, 유리창에 비친 하늘 등, 평소라면 지나치기 쉬운 것들이 시야로 들어옵니다.
이처럼 목적 없는 걷기는 ‘시선의 틈’을 넓혀 줍니다. 감각이 활짝 열려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걷기는 우리가 도시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호흡에 맞춰 함께 흐른다는 감각을 형성합니다. 또한 이런 걷기를 통해 만나는 공간은 대부분 비상업적이고 비의도적인 풍경입니다. 이는 계획된 감동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한 진짜 도시의 표정이자, 우리가 낯선 공간에서 마주치고 싶은 바로 그 ‘느낌’일 수 있습니다.
실천 방법과 여행 설계 팁
관광지를 등지고 걷는 여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먼저, 특정 명소를 중심으로 삼되, 그것을 ‘등질 수 있는’ 방향을 탐색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지도를 기준으로 북쪽에서 접근했다면 남쪽 방향으로 빠져나오는 길을 설정하거나, 검색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골목을 일부러 골라보는 식입니다. 이때 길이 막혀 있거나 위험 지역은 사전에 체크해야 하며, 너무 외곽으로 벗어나기보다는 로컬 중심지에 인접한 구역부터 시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한 시간대는 오전보다는 오후 늦은 시간이나 해질 무렵이 적당합니다. 관광지의 피크타임을 지난 후 걷기 시작하면 길은 한층 조용해지고, 도시의 실루엣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감각을 걷기와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지도 앱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가능하면 걷는 방향에 대한 명확한 목표 없이 30~40분 정도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 시간을 기록하거나 사진으로 남기기보다, 그저 몸의 리듬에 집중하고 장소의 공기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핵심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능하다면 ‘다시 관광지를 향해 돌아오지 말 것’을 권합니다.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순간 걷기는 ‘왕복’이 되어버리고, 감각은 재설정되기 어렵습니다. 다른 교통 수단이나 대체 경로를 통해 숙소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그 하루를 정리하는 방식이 더 어울립니다.
맺으며
관광지를 등지고 걷는 일은 작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정보도 부족하며, 때론 낯선 공간을 홀로 걷는 불안도 따릅니다.
그러나 그 방향에만 존재하는 풍경과 시간, 그리고 공기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장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서 잠시 벗어남으로써 진짜 장소를 만납니다.
다음 여행에는 유명한 장소에서 사진을 찍은 뒤, 한 번쯤 그곳을 등지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은 늘 그 뒤편에 숨어 있습니다.